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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의 교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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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7-30 11:43 조회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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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의 교회



서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천 년대의 교회를 평신도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기초해 성직자들이 만들어낸 이 말은 그 안에 많은 뜻과 함의를 가집니다. 이 글에서 나는 평신도라는 나의 체험 안에서 이 말을 겸손하고 자유롭게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내 체험은 CLC라는 내 성소와 조직 안에서 성숙되어온 체험입니다. 겸손하고 자유롭게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내가 평신도를 대표하려고 한다거나 내 고유한 전망이나 체험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며 내 체험과 성찰로부터 하는 이 나눔이 어떤 방법론적인 제약을 가져오거나 사람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평신도의 교회라는 표현의 첫 번째 의미는 우리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교회로서 우리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과 기회를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평신도들은 각양각색으로 섞여 있으며, 자기 자신을 넘어서며 삶 자체로 도전을 받고 있는 교회입니다. 나는 또 평신도라는 단어를 매우 광범위한 표현으로 쓰고 싶습니다. 이 말 안에는 다양한 신앙의 역사를 고유하게 살아온,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이들을 빠스카 신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으로 이끕니다.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자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교회에 대해 강한 소속감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교회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성숙되어 감에 따라 교회와의 일치도 성숙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교회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거나 교회와 멀어진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우리를 예수께로 가까이 이끌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 경우 예수께서도 우리를 힘차게 교회로 향하게 만드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치는 분리될 수 없으며 이는 그저 말로만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려움과 모순 속에서도, 저항 안에서도, 멀리 펼쳐진 프런티어를 찾아갈 때도, 우리 사도직 안에서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를 살아나가야 합니다. 또한 이 일치는 전례와 기도, 신비 안에서 기쁘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은총이기도 합니다.

 

1. 포용이라는 과제

 

평신도의 교회라는 뜻은 어느 정도는 포용하는 교회”, , 다른 말로 하면 소외시키지 않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들을 당신께로 불러오기를 바라십니다. 연령과 사회적 환경에 관련없이 모든 남녀를 불러모아 그와 함께 있고 그와 함께 일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면 교계의 친교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놀라게 하는 교회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교회는 빛나고 훌륭한 성스러움의 결실에서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 젊은이들, 홀로된 여성들,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나 깨어진 가정에서 겪는 매일의 투쟁 속에서 발견됩니다. 우리 평신도들은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의 복음이 금지하거나 방해하거나 규제하거나 가르치거나 소외시키는 말이 아니라 살아가는 실제 상황 속에 있는 삶의 언어라는 것을 알아보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자리에 있으며 함께 하는 고유하고 무조건적인 삶의 방식과도 같습니다. 선한 그리스도인의 - 그리고 교회의 - 이미지는 정형화되어서는 안되며 더 역동적이며 가장 어두운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 안에서도 선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다원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더 관용의 삶을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의 활동 영역에 제한이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점점 더 소외되게 됩니다. 또한 나는 우리 교육, 교회 교육이 더 다원적이고 변화를 수용하며 차별하지 않고 더 큰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결실을 맺어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복음의 중요한 덕목은 포용하고 통합하는 점이고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우리 각자가 더 교회다워 져야하고, 밖으로 나아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을 판단하지 않으면서 환대하고 더 많은 교회를 만들어야합니다. ‘썩은 사과의 이미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는 손상된 이콘의 이미지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콘들은 많은 시련과 격동 속에서 훼손되었지만 원래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손상되고 그 아름다움이 가리워진 이콘을 팀으로 함께 회복시키면서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손상된 이콘을 회복시키는 데는 섬세하고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과 먼지를 털어내고 원형을 복구해내는 무수한 붓터치가 필요합니다. 이럴 때, 우리 자신 역시 성장하고, 교회가 성장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썩은 사과들의 이미지와 얼마나 다른 이미지인가요!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어 , 좋은 사과만 고르고 썩고, 못생긴 사과들은 버리지 않고 포용하고, 회복시키기를 빕니다. 죄의 상황에서 우리는 죄를 지은 각 개인들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교계적인 죄 역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간디가 자신의 아들이 죄를 지었을 때 자신 스스로를 벌했던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회는 위에 언급한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2. 양성에 있어서 정신 또는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과제

 

평신도의 교회는 진리에 접근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방향과 초점이 변화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양성 계획이나 방식 그리고 가르침을 행함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진리를 갈망하고 진리를 구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입맛대로 왜곡시키는 상대주의나 기회주의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가르침은 하늘에서 사람들에게 무겁게 내려오는 진리가 아닙니다. 몇몇 뛰어난 설교나, “상부로부터 내려와개인에게 하나의 압박처럼 느껴지는 그런 운동이 아닙니다. 바로 각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서 진리에 압박감을 느껴서가 아니라 진리에 매료되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은 체험과 성찰을 통해, 공동체와 함께 아래로부터 올라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설교자나 자신을 방어하는 말이 아니라 진리로 향하는 길을 함께 걸을 좋은 동료들입니다. 이런 동료들은 무조건적으로 함께 하고 공감하고 연대합니다.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획은 인간이 산 꼭대기에서 받아서 산 아래 사람들에게 들고 내려간 계명판에 있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하느님 자신이 인간으로 육화되심에 있습니다. 스스로 인간의 체험을 찾아 오셨고, 이 체험이 성장하게 하시어, 타볼산에 올라가 변모하셨지만 거기 머무르시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은 말씀의 전적인 죽음과 전적인 십자가의 외침과 부활에 있습니다. -계속-

 

 

*이 글은 프로그레시오 부록 #59(2004년 12월)에 실린 글로, 당시 CLC 부의장인 Jose Reyes가 2004년 에콰도르 퀴토에서 열린 마지스 프로그램에서 한 연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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