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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삶(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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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5-11 12:19 조회1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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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글입니다​.

 

되돌아보기

 

예수가 제자들에게 좀 쉬어라”(마르코 6:31)에서 하신 초대를 보면서 예수가 성찰의 시간을 존중하고, 바람직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자신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그들의 바쁜 삶이 의미 있고 깊어지려면 하느님과 함께 할 시간을 따로 떼어 두는 것이 핵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삶도 바빴고, 그는 후에 제자들에게도 바쁘게 가서 모든 국가를 가르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과거에 그들을 어떻게 이끌어오고 계셨는지 그 모습을 살펴보면서 그들은 앞으로 보다 분명하게 일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삶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종종 그 의미를 보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이 사건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이 일을 견디어나간다. 즉 보지 않고도 믿는다는 마음으로. 시일이 지나 이런 사건들이 과거지사가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의 거룩한 의미에 대해서 볼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에게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되돌아보는 것이 성찰하는 삶의 핵심을 이룬다. 우리의 과거는 거룩한 의미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기억 속에 현존하신다

 

이는 뉴만이 했던 설교 제목이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의 존재는 그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일이 다 끝난 후, 지나간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그 때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을 입증해 줄만한 성서 구절도 다양하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고 돌아가신 비극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가 그들과 대화를 하는 동안에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예수는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3:7). 

또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이렇게 외쳤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창세기 28:16). 야곱은 요셉을 잃고 시메온을 잃고 급기야 벤자민까지 잃게 되자 이렇게 한탄한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들이닥치다니!”(창세기 42:36). 사실, 어느 면에서 보면 이 사건들은 악마가 저지른 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야곱은 후에 하느님께서 신비하고도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이 안에서 일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아들 요셉은 이 모든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창세기 45:5)”.

 

체험과 의미

 

그러므로 우리들은 시간을 내고 기억을 되돌아보면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되며, 그분이 우리 삶 안에서 성스럽게 짜 나가는 은총의 천을 알아가게 된다. 삶을 단순한 사건이나 참혹한 기억들의 우발적인 연속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찰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감각을 키워나간다. 이제 우리는 과거에는 운이 따랐다거나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성삼위가 끝없는 미적인 감각과 계획안에서 우리 삶을 매우 민감하면서도 진지한 사랑으로 짜 나가고 계시다는 것으로 제대로 해석하게 된다. 성삼위는 우리의 모든 희망이나 꿈을 뛰어넘어 당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그분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은 진정한 기쁨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 기쁨으로 우리들은 대부분 우리들이 살아 나가는, 소로우의 말을 빌리자면, 침묵하는 절망의 태도를 버릴 수 있게 된다.

 

과거에서 미래까지

 

과거를 돌아보고 회상하는 것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계셨는지 또 이 사건이 어떻게 우리를 놀라움과 감사, 찬양으로 이끌어가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점에서 은총의 사건이다. 그리고 그 이상이 있다. 과거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미래의 방향을 잡아나가게 된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것, 우리에게는 혼란스럽게 보이는 일에서도 질서를 잡아나가실 것이라는 깊은 안도 속에서 계속 나아가게 된다. “당신의 힘이 우리를 축복하는 한, 분명히 우리들을 이끌어나가실 것입니다.”(뉴만

우리는 과거의 모든 사건과 세세한 일들의 원인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성삼위가 우리를 돌보고 계셨고,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호세아 11:4) 우리들을 인도하셨는지를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이를 통해서 우리들은 성삼위의 사랑 안에 우리 마음을 두고 하느님이 주시는 어두움이라면 그 어둠 속을 계속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뉴만의 소설 안에서는 한 젊고 열정에 가득 찬 신부가 가난한 여성에게 성찬례를 거행하는 장면이 있다. 제대포도 초도 없고 오직 을씨년스러움이 감돌았다. 그 신부의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이 솟아올랐다. “제가 이 예식을 해야 하나요그는 아마 그냥 성찬례를 행하고, 마친 후에 이 일을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신부는 이를 깊이 묵상했고, 서서히 자신의 태도에 드러난 죄성과 그리스도께서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 계신지를 보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들을 되돌아보는 것을 꺼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보게 될 일에 대해서 두려워한다. 쓰라린 관계, 공허한 시간, 죄성, 실패.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억누른다. 하지만 은총이 어디에나 있다고 확신하면서 성 베르나르도는 한 시골 신부의 일기의 끝을 맺는다. 예수는 골고타 언덕에 계시고 죄인들은 지옥의 문턱에서 그의 발자취를 보게 될 것이다. 그를 따르면 구원과 기쁨이 온다.

 

 

하느님의 계획

 

거기 누구 있나요?”

 

이제 우리는 현재와 과거의 경험 그리고 그 풍요로운 의미와 만나는 방법을 살펴봄으로써 나아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조정하시고, 우리의 무수한 체험들을 마련하시는 분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샤르뎅의 표현을 빌자면 성스러운 환경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성스러운 계획안에서 덮여 있으며 그 안에 싸여있다. 하느님에게 우리는 하염없는 사랑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느님의 마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너무나 친절하게 만들어진하느님의 계획을 탐구할 시간이 필요하다.

 

최근 열린 한 워크숍에서 한 참석자가 이런 말을 했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 차체가 놀라울 뿐입니다.” 이런 혼돈의 정서가 현대 철학의 주제이다. 세상은 거대한 공사판 같아서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는 있지만 계획들은 없어졌고, 건축기사 역시 사라져 버린듯하다. 매일 밤 TV 뉴스를 보면 이런 느낌은 더 커진다. 세상에 대한 전망이나 대안을 찾아보려면 쉴 새 없이 이 세상을 올바른 곳으로 이끌어가고자 수고하는 창조주의 계획을 깊이 알아차려야 하고, 끝없는 존경을 가지고 우리 각자를 다시 세우는 자리에서 몫을 다해 가도록 이끌고 계시는 분을 인식해야 한다.

 

종합적인 지혜” (에페소 3:10)

 

하느님 계획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 부분은 에페소서 1:3-14이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것을 집약한다물론 그가 보낸 모든 편지 안에서 바오로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신비즉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계획을 탐구하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이 구절을 읽고 천천히 맛보고, 존경하고 감사하도록 초대받는다. 위대한 음악처럼 이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온화하지만 깊게 드러난다. 특별히 이 안에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하도록 한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여러 번 언급되었는지, 그리고 10절에서 모든 것또는 모두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여기서 계획은 단어 자체의 의미만으로는 그 의미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계획은 사랑의 계획, , 지향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 남자가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의 의향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쏠리게 되어있다. 상대방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해주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하며 비록 상대방이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정으로 좋은 것을 해주려는 사랑의 관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성삼위와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성삼위는 자애롭게 사랑하시는 분이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스러운 아들딸이다. 친절과 열정, 창의성이 넘치는 그분의 계획은 인류의 행복과 동료애와 평화를 구하는 가장 깊은 갈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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